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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edit 김윤세 본지 발행인·전주대 경영행정대학원 객원교수
  • 입력 2022.03.01 00:00
  • 수정 2022.03.02 18:02
  • 댓글 1

인산을 알고 자연치유를 접하고 마침내 암을 이겨내다

말기 방광암 해결한 의지의 투병 사례 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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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시한부로 판명 난 말기 방광암을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 극복한 의지의 인물 이정갑 대표. 그는 도쿄의 첨단 의료 시스템과 섬서성(산시성)의 양방과 한방을 두루 경험하며 인산의학의 자연치유 방안이 진정한 참의료임을 터득하게 된다. 죽염과 밭마늘이 건강의 보루임을 증명하는 그의 건강 회복기 하편을 전한다.
 

낫지 않는 병은 존재하지 않는다  

…방광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니 호기롭게 의사와 언쟁을 벌이던 기운은 슬며시 사라지고 걱정과 염려로 마음은 새카맣게 타고 말았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절실해서인지 잊고 지냈던 인산 선생의 책들을 다시 꺼내어 탐독을 하며 회복의 기세를 키워나갔다. 며칠 후 ‘죽염으로 반드시 고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내리며 인산가 매장을 찾아가 죽염을 살펴보고 있는데 마침 김윤세 회장을 마주치게 돼 한참을 얘기할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암이라는 게 그래봐야 병 아니겠습니까? 피가 맑고 깨끗하면 만병이 물러가는 게 이치니 죽염에 밭마늘을 열심히 드시면 괜찮아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내 결심과 같은 내용이었다. 

김 회장의 조언에 더 힘을 내 그날부터 찻숟갈도 아닌 밥숟갈로 거의 두 달 동안 죽염과 밭마늘 가루를 먹었다. 먹기 시작하자마자 방귀가 수없이 나오는 터에 주변 사람이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속이 편안해지자 식욕도 한결 좋아졌는데 소변 빈도와 혈뇨는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러다 온몸에 암이 퍼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설핏 들기도 했다.  
 

일본 의사의 남다른 조언 

마침 일본에 있는 아들이 손자를 낳았다고 하여 손자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죽염과 밭마늘 가루를 싸 들고는 일본으로 갔다. 아들에게는 몸이 좀 불편해 진찰을 받아야겠다고 하고는 국립 오쿠라병원에 들러 그곳 비뇨기과 과장에게 서울에서 가지고 온 필름과 진료기록을 보여주었다. 서류를 살펴본 후 아들과 몇 마디 나누는데 아들 얼굴이 금세 백지장이 되었다. 나는 “암이라고 하지? 너희가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았는데 죽염과 마늘로 많이 좋아지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의연히 말하며 의사에게 “어떤 방법으로 치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 일본 의사는 “항암제로 해보고 차도가 없으면 최후엔 수술해야 하는데 암은 수술하면 전신에 퍼져 일 년 반가량의 생명 연장 외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즉시 수술해야 한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수술하면 왜 안 된다고 하느냐?”고 되물었더니, 일본 의사는 “한국 의료진의 논리를 평가하는 것 같아 같은 의사로서 대답하기 곤란하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나는 “한약으로 치료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질문을 했고 그는 이런 대답을 들려주었다. “나는 서양 의학을 전공해 한의학에 관해서는 별다른 이해가 없어 조언할 수는 없지만 한약으로 치료된 사람을 본 일은 있다.” 같은 양의(洋醫)이면서 한국 의사와는 인식이 하늘과 땅 차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암약을 찾아 중국에 갔더니 

병원을 나와 낙심하는 아들을 위로하며 해산한 지 얼마 안 되는 며느리에게는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한 후 오랜만에 부자가 함께 일본 명승지를 여행하는 시간을 보냈다. 나나 아들이나 병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유려한 풍광을 즐겼지만, 아들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암이라고 하면 사형선고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부자간의 여정이라 착잡하고 서러운 마음이 울컥 솟아 몸을 가누는 것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여행이었다. 

아들 내외와 어렵게 작별한 후 서울로 돌아와 계속 죽염을 먹으며 인산 선생의 책을 탐독했다. 책의 내용 중 삼보주사(三寶注射)나 오핵단(五核丹)이 좋을 것 같았지만 감히 만들 엄두가 나지 않았고, 죽염과 밭마늘이 제일이고 탕약은 보조라지만 그중에서도 암의 주장약은 ‘부자(附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신약본초(神藥本草)》에는 부자 중에서도 섬서부자(陝西附子)라야 한다는 말씀이 쓰여 있었다. 이 말씀에 의문이 생겨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명확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모 방송국의 대체의학에 관한 프로그램에서 섬서라는 말이 나왔고 확인해 보니 그것은 중국의 한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죽염과 밭마늘 가루를 챙기고 여장을 꾸려 중국으로 건너갔다. 베이징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서울에서 베이징까지의 거리보다 더 먼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에 도착했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조선족 통역을 만나 암약을 조제하는 의사를 찾아가 약에 부자가 들었는지, 부자는 섬서부자인지를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며 중국에서도 부자는 섬서부자가 제일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인산 선생 전기를 봐도 선생이 이곳에 오신 일은 없고, 또 섬서성에 대해 따로 말씀하신 일도 없었으며, 모든 약재는 조선 토종이 최상이라고 주장하셨는데 어째서 부자만은 이곳이 최상이라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의문을 풀 만한 지식과 정보를 구할 수 없음에 우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물음은 내려놓고 그 모든 게 이치려니 여기며 섬서부자를 넣은 약을 지어 서둘러 돌아왔다.
 

중국 암약과 밭마늘죽염요법 

흥미로운 이야기가 또 하나 있었다. 중국 현지 의사의 특이한 설명 중에 “금기하는 음식은 없으나 돼지의 머리 고기만은 먹지 말라”고 하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돼지 간과 머리에는 해독 작용을 하는 성분이 있는데 약도 결국은 독이어서 돼지머리 고기를 먹으면 약효가 중화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이 벌써 인산 선생의 《신약(神藥)》을 읽고 그대로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들의 이론은 인산의학의 이론과 동일한 점이 정말 많았다. 

그들은 “양의(洋醫)와 중의(中醫)를 함께 전공했으며 암 수술 경험도 많지만 양의 체계에 한계를 느껴 동양의 의술을 접목한 치료 체계를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그 치료 프로그램과 처방이 인산의학과 상통하며 죽염의 효과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말은 들었으나 잘 모른다”며 “수술과 항암제 투여는 경험과 통계만 보아도 암을 극복할 방법이 못 되며 효력이 없다”고 했다. 인체가 항암제의 엄청난 부작용을 이겨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와 죽염과 마늘을 당분간 먹지 않고 중국 암약을 먹으며 경과를 보았더니 열흘 후부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죽염과 밭마늘 가루를 먹었을 때와 똑같은 상황, 즉 방귀가 엄청나게 나오고 식욕이 증진되는 것이었다. 즉 죽염과 밭마늘 가루를 먹었을 때 일어나는 변화와 섬서부자가 든 약을 먹었을 때의 호전도가 일치하는 것이었다. 죽염과 밭마늘이 몇백만 원을 들여 지은 섬서부자 암약의 효과와 일치하는 것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바라본 동양 3국의 의사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세 나라를 다니며 진료를 받고 상담을 해본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3국의 차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의사는 자기 분야에 철저하면서도 환자에 대해 적극적이고 좀 더 솔직한 면을 갖고 있었다. 환자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의사로서의 덕목을 잘 갖추고 있으며 특히 자기 분야 이외의 치료 체계에 대해 부정하거나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중국 의사는 주관이 뚜렷하고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며, 새로운 것에 대한 개척과 진취적인 자세가 역력하였고 국가적 차원의 지원도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이 땅의 의사들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만들어진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을뿐더러 환자에 대해 오만불손한 태도를 아무렇지 않게 내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오직 내가 아는 것이 최고이고 정당할 뿐, 자신의 영역 밖의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려 하거나 수용하지 않으려는 타성적인 시각을 내보이곤 했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의사에 대한 나의 견해는 대부분의 우리가 공감하는 부분이다. 어떤 의사는 인터넷 사이트에 죽염을 ‘고혈압에 독’이라고 썼는데, 내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를 그 의사에게 묻고 싶을 뿐이다.  
 

암은 큰 병 아니다

지금 내 몸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CT 촬영과 MRI 촬영의 결과지를 살펴보면 직장 부분에 침윤된 종양은 깨끗이 없어졌고, 방광 부분의 종양은 아주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계속해서 죽염과 밭마늘 가루를 복용하며 섬서부자가 든 약도 먹고 있다. 체중은 과거와 비교해 2~3kg이 늘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암 투병 사실을 모르고 무슨 보약을 먹기에 몸이 점점 좋아지냐고 물을 정도다. 

지난 3월, 인산가에서 마련한 건강 모임에는 일본으로 와서 항암제 주사 맞으라고 전화로 매일같이 졸라대던 아들과 막내 사위까지 데리고 가서 인산 선생님 묘소에 참배를 했다. 저녁엔 풍성한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시원한 막걸리를 마음껏 마시고 사물놀이패의 흥겨운 가락에 춤까지 추었다. 암은 인산의학의 방식대로 하면, 김윤세 회장님  말씀대로 그리 큰 병이 아니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됐다. … 마침
 

암 극복 후 자신의 소중한 경험 널리 알려

학습과 노력만으로 암을 고칠 수 있을까? 이정갑(67·‘한국 암을 이겨내는 사람들’ 회장) 대표가 바로 그런 사례이다. 그는 암 진단을 받은 후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등을 오가며 암 권위자를 두루 만났고 많은 치료법을 접했다. 이때 접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병세에 맞는 치료를 선택했다. 

그는 1997년 5월부터 1년 반 동안 시안과 베이징을 오가며 최고 권위자 두 사람에게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받던 중 북한의 의학 전문가를 만나 김일성 주석의 건강을 전담했던 ‘북한 장수연구소’에서 개발했다는 ‘금당-2호’ 주사 치료도 받았다. 1년 반 만에 CT를 찍었다.

종양은 동면(冬眠) 상태로 있었다. 의사는 절반의 성공이라며 축하해 주었지만, 그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의 재발, 악화가 없으니 그냥 이대로 죽을 때까지 갈까’ 고민도 했다. 그러나 동면 상태는 이제까지의 학습과 노력의 성과물로 부족했다. 오직 완치만이 목표였다. 

다시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당신은 지금 암도 문제지만 콩팥이 더 위험한 상태”라며 수술을 권했다. 그는 20여 일을 망설인 끝에 마침내 수술대 위에 누웠다. 절개해 보니 암 종양은 방광 한 곳에만 집중돼 있었다. 

의사는 다시 항암 치료를 제의했다. 이정갑 대표는 항암제의 후유증을 소상히 알고 있는 터라 일거에 거절했다. ‘항암제 치료율 10%는 나머지 90%의 고통을 상쇄할 만한 이익이 없다’는 게 그가 내린 최종 결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상처도 아물었다. 암에서 힘들게 빠져나오니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환자들과 그의 가족들. 병원 문을 나서면서 결심했다. 암 환자들에게 암 실상을 알리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고. 뜻이 맞는 지인들을 규합했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한국 암을 이겨내는 사람들’. 

지난 2000년 10월 의약 분쟁 사태로 의사들이 진료를 거부하고 나섰을 때 의사협회와 복지부 관계자들의 회의장에 박차고 들어가 “지금 환자들이 병원 바닥에서 죽어 나가는데 밥그릇 싸움이나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이 장면이 공중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지면서 이정갑 대표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됐다. 《라이프매일》 2006년 7월 16일 자 기사 중에서  

일러스트 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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